Ticket to the Moon

- [오늘 시간 돼?] 잠시 머뭇거리다 휴대폰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은 용선이 짧은 한숨을 내쉰다. 못 본 척 하기엔 너무 정확히 봤고 잘못 봤다고 치기엔 정확하게 이해했다. 간결한 물음에 뒤따를 답변은 예스 또는 노 둘 중 하나일 뿐인데도 어느 하나 선뜻 택할 수 없어서 무응답을 택한다. 흑과 백이 선명한 정휘인 성격상 저 질문도 최대한 돌리고 돌린 결...

- 불편했다. 그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 와 이건 좀 너무한데, 싶을 정도로. “밖에 커피차 왔던데 드시고 하시죠?” 누군가 쩌렁하게 외친 목소리에 그나마 분위기가 환기됐다. 이마를 긁적이던 용선이 아, 하고 웅성이며 움직이는 인파 속에 섞였다. 근데 누구 앞으로 온 거래요? 대본집을 돌돌 말아 어깨죽지를 툭툭 치던 용선의 발걸음이 뚝 멈춘 건, “사랑...

- “저 앞에서 잠깐 세워주세요.” “뭐하게?” “살 거 있어서. 급한 일 없지?” 자연스레 차에 올라 탄 용선이 익숙한 사거리가 나오자 앞자리의 기사에게 손짓했다. 옆자리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보던 문별이가 뭐하게, 하고 대화에 끼어들자 살 거 있어서, 하고 답한 용선은 제법 당당하게 뒷말을 이었다. 오늘은 일정이 빠르게 마무리 된 탓에 딱히 바쁠 것까...

- 한 번만 더 문별이랑 술 마시면 내가 개다, 사람이 아니라. 라고 김용선은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개다. 사람이 아니라 개야. 용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휴대폰 너머 낭랑한 목소리가 뭐라 말하든 말든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언니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

- 언어가 가진 힘은 오묘하다. 이미 한참 전 피부로 실감한지 오래지만 다시 한번 깨닫는다. 어쩌다보니 내뱉은 곧 정리하겠노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이, 일종의 시간제한을 두고 남겨둔 미션과 같이 느껴졌다. 굳이 그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끝내야 할 관계였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막연히 그래야 한다,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 시기나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

- 어찌 됐든 술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체질상 받지 않았거니와, 특히 문별이와 김용선 사이에서는 독약과 다를 바 없다고 다시 한번 되새긴다. 그게 알콜이든 논 알콜이든. 그래, 곱씹어 보자면 애초에 엮이게 된 타이밍에도 빠지지 않고 자리했었는데. “식상하다 식상해….” 입에 초코과자 하나를 문 용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하긴 두...

- “인터뷰? 뭔 인터뷰?” ‘아직 못 들으셨어요? 잡지 인터뷰인데 홍보용 영상은 10분짜리로 편집해서 올라갈 거고 LK 측에서 사전 질문 미리 받겠다고 했다던데, 협의된 거에 대해서만 답하겠다구요.’ 끝에는 황당하다는 웃음이 덧붙었다. 전혀 못 들으신 거예요? 다시 한번 묻는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한 용선이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끊어, 하고 통화를 ...

- “솔로요?” “그룹 런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다음 데뷔 기다리려면 늦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너도 불안하잖아 이대로 마냥 기다리고 있는 거.” 인생이 얄궂다. 언니는 대표 앞에서 배짱 좋게 본인 하고 싶은 말은 잘도 하던데. 언젠가 한 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대표인데 무섭지 않느냐고.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의 용선이 그때 먹었던 게 생크림 케...

- “마실래? 한 잔 줄까?” 뻐근한 목을 주물거리며 방에서 나온 별이가 곧장 걸음을 옮긴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나가려던 찰나에 들려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아일랜드 식탁 너머에 비스듬히 기대 선 용선이 눈을 깜빡이며 손을 들어 보인다. 별다른 대답 없이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줘, 말아?’ 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에는 들을 필요도...

- “이게 감금이지 휴식이냐고.” “안 걸릴 자신 있으면 나가도 된다니까?” “뭐 이런 무책임한….” 타이밍의 문제였다. 당연히 각자의 집에서 칩거 생활을 즐길 거라 예상했던 계획이 보기 좋게 틀어졌다. 이미 되돌리자니 애매하게 따라붙을 기자들이 문제였다. 엉겁결에 나란히 들어선 신혼집이 휑하게 느껴진다. 약 한 시간 동안 현실을 부정하며 왔다 갔다 하던 ...

- “머리야….”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용선이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고강도로 이어진 공연에서도 이 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체력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게 된 최근이 당황스러웠다. 진짜 누구 말대로 약이라도 한 재 해 먹어야 하는 건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감이 얼굴로 몰린다. 입을 꾹 닫은 채 숨을 삼켜내던 용선이 몸을 ...

-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인생이 죄다 장난 같다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누구에 의해서인지 알 순 없지만 최근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생에 이제는 한탄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할 힘이 있다면 외치고픈 건, 제발 꿈이었으면. “인사는 드려야 할 거 아냐.” “누가 몰라?” 평생 볼까 말까 한, 심지어는 볼 생각도 딱히 없었던 여자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