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Moon

- “정리는 좀 됐어?” “대충.”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조차 흐릿한 하루였다. 라디오방송을 마친 별이가 곧장 제 차에 올라타 네비게이션을 켰다. 생전 가본 적 없는 주소라 몇 번이고 휴대폰 액정에 찍힌 주소지와 비교하며 조심스레 화면을 터치하고는 즐겨찾기에 등록까지 마쳤다. 눌러쓰고 있던 캡모자를 다시 한 번 고쳐쓰고 핸들을 잡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

- 꽤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차가움에 코트 깃 사이로 얼굴을 잔뜩 숙이고 종종걸음을 하던 별이가 제 눈에 들어온 카페에 잠시 발길을 멈췄다.어느새 올라간 입꼬리를 느끼며 다시금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손이 따뜻했다. 언제더라-. 일방적인 저의 구애에 응하지도,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은 용선과 아슬...

- 굳이 꺼내 묻진 않았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로 저에게 안긴 채 걸어나온 용선이 별 말 없이 제 차에 올라탔다. 차가운 칼바람에 뒤에 놔뒀던 담요를 꺼내든 별이가 안전벨트를 채우고는 그 위에 담요를 덮었다. 그래도 미리 히터를 틀어둔터라 차 내부가 한결 따뜻했다. “집을 오래 비웠더니 휑하네. 누워서 좀 자고 있어, 나 마트 좀 다녀올게.” “배 안...

- ‘뭐해요?’‘나, 가족들이랑 식사있어.’오랜만에 제때받은 전화였다.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온 용선이 겨우 숨을 돌렸다. 꽉 막힌 공기가 짓누르는 압박감이 오랜만이었다. 말을 이어가려는듯 들려오던 별이의 숨이 멈췄다. 언니, 살 빠졌던데. 밥 좀 잘 챙겨먹어라. 일상적인 걱정에 마음이 뭉근해졌다. 응, 이따 전화할게. 늘상 전화...

- “라면이라도 끓여줘요?” “아니.” 식탁에 앉아 맥주 캔을 따는 별이를 본 휘인이 영 탐탁잖은 표정을 지으며 짝다리를 짚었다. 꽤 맛집으로 소문난 일식집을 찾아냈노라 연락을 하자 그래? 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쪼옴-. 나는, 듣고 있으면 귀 잘릴 것 같은 그 위험천만한 사랑 이야기도 다 들어주는데, 맛집정도는 같이 가 주지? 투덜대...

- 이 재미 없는 게임은 도대체 얼마나 더 지속될 예정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결말이 더 궁금했다.바다의 파도 대신 일렁이는 마음을 품은 채 한참이나 눈을 들여다 봤다. 모처럼 편안한 얼굴을 한 용선은 한사코 괜찮다는 저의 말에도 웃음만 지으며 옷을 끝까지 갈아입지 않았다.그만 좀 아프면 안돼?

- 시동을 켜고 핸들을 붙잡았다. 잔뜩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도 제 쪽으로 몸을 돌려 저의 손을 붙들고 있는 용선이 사랑스러웠다. 진짜 내가 보고 싶긴 했나보다, 이 언니가.언니, 피곤하면 눈 좀 붙여. 가는데 시간 걸려.딱히 대답이 없다 했더니, 진짜 잠 든 모양이었다. 제 손안에 잡히는 손가락을 조물거리던 별이가 마침 걸린 신호에 옆을 쳐다봤다. 볼살도 ...

-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천장만 바라보던 용선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암막커텐을 쳐 놓은 덕분에 햇빛이라곤 한 줄기도 들지 않는 방이었다. 몇 시쯤 됐을까. 하긴, 나한테 시간이 언제부터 의미 있었다고.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에 뒤집어썼다. 금세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숨쉬는게 조금 불편해졌다. 이대로 죽으면, 넌 날 불쌍해 하긴 할까.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

- 조용한 연습실 한 켠에 가방을 내려놓은 별이가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쓰며 생수통을 집어들었다. 꼬박 일주일 째였다. 따지고 보면, 서로 모른 채 살았던 세월이 훨씬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떨어져 있는게 어색한 사이라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게다가 용선은 돌아갈 곳이 있는 위치였다. 꽤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그 때가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용선의 ...

- 진짜 무슨,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듯 피식 웃은 대표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동안 이게 웬 떡이냐 싶을정도로 러브콜이 쏟아지더니, 인터넷에 무차별적으로 확산 된 그 루머덕에 아직 날짜가 다가오지 않은 스케줄은 죄다 무산이 돼버렸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인 광고모델 체결 건은 그렇다 치고, 계약서의 ...

- “뭔일이당가, 진짜.”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휘인이 입을 쩍 벌렸다. 아무래도 별이가 걱정돼서 살 수가 없었다. 아, 이 놈의 두 여인은 어쩌다 내 인생에 들어와서.하루가 멀다하고 바람잘 날 없는 바닥이긴 했지만, 유독 바람을 떠나 천둥번개에 우박까지 쏟아내리는 중인 근래의 연예계에 신물이 났다. 그래도 저는, 그 요란법석한 상황을 안전한 집 안에서 ...

- “저 왔어요-.” 꽤 무게감 있는 철제문을 밀며 들어선 용선이 문 높이에 맞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우중충한 녹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진 문 곳곳에 녹이 슬어있었다. 끼긱 거리는 불쾌한 소리에 잠시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꽤 높은 문턱을 넘어서며 표정이 풀렸다. 묵직한 짐가방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집을 찾아 오는 동안 만난 두어명의,...